강의자료를 만드는 방법은 오랫동안 두 가지였습니다. 직접 한 장씩 만들거나, AI 슬라이드 생성 도구에 맡기거나.
저는 둘 다 해봤습니다. 직접 만들면 시간이 갈렸고, 생성 도구(젠스파크를 썼습니다)에 맡기면 비용이 계속 나가는데 결과물은 매번 다시 고쳐야 했습니다. 제 표준 양식은 4:3 비율에 정해진 색과 헤더 구조가 있는데, 나온 슬라이드는 늘 그 양식이 아니었으니까요. 더 지치는 건 세 번째였습니다. 같은 수정 지시를 매번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습니다. 어제 한 말을 오늘 또 하는 식입니다.
그래서 접근을 바꿨습니다. 슬라이드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대신, 내 제작 방식을 문서로 만들어 AI에게 넘기는 쪽으로요. 하루 만에 특강용 16장과 4시간 과정용 70장이 나왔고, 더 중요하게는 다음부터 쓸 시스템이 남았습니다.
아래는 제가 실제로 밟은 순서 그대로입니다. 코딩은 한 줄도 하지 않았고, 쓴 도구는 클로드 코워크(파일과 폴더를 다루는 AI 작업 환경) 하나입니다. 다른 AI 도구를 쓰셔도 원리는 같습니다.
1단계 · 폴더부터 만듭니다 (여기가 절반입니다)
프롬프트부터 고민하지 마세요. 폴더 구조가 곧 작업 절차가 됩니다. AI는 이 구조를 보고 지금이 어느 단계인지 판단합니다. 제가 쓰는 구조는 이렇습니다.
강의자료/ ├─ 00_작업방침.md ← 규칙을 적어 두는 문서 (핵심) ├─ 01_양식/ ← 표준 양식 PPTX 원본 1개 ├─ 02_샘플/ ← 내가 편집을 끝낸 완성본 PDF ├─ 03_삽화라이브러리/ ← 재사용할 이미지 모음 ├─ 10_강의별/ │ └─ 2026-08_○○교육/ │ ├─ 1.기획 ├─ 2.초안 ├─ 3.삽화 └─ 4.최종 └─ 99_아카이브/
- 01_양식은 손대지 않는 원본입니다. 새 자료는 여기서 복제해 시작합니다.
- 02_샘플이 나중에 큰 역할을 합니다. 제가 직접 다듬어 끝낸 결과물을 여기 넣어 두면 AI가 제 취향을 여기서 배웁니다.
- 03_삽화라이브러리는 회차가 쌓일수록 값이 오르는 자산입니다. 지금 18개가 모였고, 새 강의에서 재사용합니다.
- 1.기획 → 2.초안 → 3.삽화 → 4.최종 네 칸이 제작 단계입니다. 파일이 어느 칸에 있는지가 곧 진행 상황입니다.
폴더를 만들었으면 AI 작업 환경에 이 폴더 하나만 연결합니다. 홈 디렉터리나 클라우드 드라이브 전체를 연결하지 마세요 — 이유는 뒤에 따로 적었습니다.
2단계 · 내 양식을 AI에게 분해시킵니다
첫 지시는 '만들어 줘'가 아니라 '읽고 정리해 줘'입니다. 제가 20년 넘게 써온 양식 파일을 열어 규격을 뽑아내게 했습니다.
돌아온 결과에는 슬라이드가 4:3이라는 것, 제가 쓰는 네이비 색상 코드, 폰트, 16개 페이지가 각각 어떤 역할(표지·목차·본문·정리 등)을 맡는지가 표로 정리돼 있었습니다. 제가 감으로 쓰던 것을 처음으로 수치로 본 순간이었습니다.
그리고 규칙 한 줄을 덧붙였습니다. 이 한 줄이 '다시 고치는 일'을 없앴습니다.
이후 나온 슬라이드는 제 양식과 100% 같았습니다. AI 쪽 용어로는 시스템 프롬프트나 컨텍스트 엔지니어링에 해당하지만, 제가 만든 것은 사람이 읽을 수 있는 문서 한 장이 전부입니다.
3단계 · 방침 파일에 무엇을 적을 것인가
방침 파일(00_작업방침.md)은 이 시스템의 심장입니다. 형식은 자유지만, 저는 여섯 절로 나눠 두고 있습니다.
- 절대 규칙 — 어길 수 없는 것 두세 줄. (양식 복제, 빈 화면 금지, 검증 안 된 수치 금지)
- 양식 사양 — 2단계에서 AI가 뽑아낸 수치.
- 제작 절차 — 폴더 흐름(기획 → 초안 → 삽화 → 최종)과 각 단계에서 할 일.
- 명령어 사전 — 반복 업무를 한마디로 묶은 것. (4단계에서 설명)
- 스타일 규칙 — 제 수정 지시가 쌓이는 곳. (5단계가 핵심)
- 변경 이력 — 날짜·내용 표. 규칙이 왜 생겼는지 나중에 추적하려고 둡니다.
처음부터 완성하려 하지 마세요. 1·2번만 채우고 시작하면 나머지는 일하면서 저절로 쌓입니다.
4단계 · 반복하는 일을 '명령어'로 만듭니다
같은 요청을 세 번 했다면 명령어로 만들 때입니다. 방침의 명령어 사전에 이렇게 정의해 둡니다.
### 명령어 사전 **"아카이브 해"** 1. 03_삽화라이브러리에서 이번 강의에 쓴 이미지 확인 2. 더 안 쓸 파일 목록을 먼저 보고할 것 (바로 지우지 말 것) 3. 승인받은 것만 99_아카이브로 이동 4. 방침에 반영할 내용이 있으면 알려줄 것 **"삽화 넣어줘"** 3.삽화 폴더의 지정 파일명 이미지를 슬라이드 정위치에 삽입
이제 "아카이브 해" 한마디면 네 단계가 알아서 돕니다. 설명이 짧아지는 게 아니라 설명 자체가 필요 없어집니다. 2번에 '바로 지우지 말 것'을 넣은 게 보이실 겁니다 — 지우는 동작에는 반드시 보고 단계를 끼워 두는 편이 안전합니다.
5단계 · 피드백을 휘발시키지 않습니다 (여기가 핵심)
초안이 나오면 수정 지시를 합니다. "표지에 삽화 넣지 마", "상하 마진 똑같이", "글자 더 크게", "표 안은 세로 중앙 정렬", "키워드는 확 키워", "설명은 한 줄로". 보통은 고치고 끝나는 말들입니다. 그래서 다음에 또 말하게 됩니다.
딱 한 문장을 방침에 넣으면 이 반복이 끝납니다.
그날 하루에만 규칙 9건이 쌓였습니다. 그리고 같은 지적을 두 번 한 적이 없습니다. 회차가 갈수록 지시가 줄어드는 구조입니다.
한 걸음 더 — 완성본을 넣고 스스로 배우게 하기
제가 직접 편집을 끝낸 완성본 PDF를 02_샘플에 넣고 이렇게 시켰습니다.
71페이지를 대조한 AI는 삽화 배치 방식(크게, 맨 뒤, 하단 정렬), 밑줄 강조 색 체계, 화면 캡처를 다루는 법까지 규칙 5개를 스스로 뽑아 올렸습니다. 제가 설명한 적 없는 것들이었습니다. 완성본을 버리지 말고 한 폴더에 모아 두시길 권합니다.
6단계 · 사람이 할 일과 AI가 할 일을 나눕니다
- 삽화 — AI가 슬라이드에 자리를 번호로 비워 두고 이미지 생성 프롬프트를 만들어 줍니다. 저는 이미지 생성 도구(나노바나나를 씁니다)로 뽑아
3.삽화에 넣기만 합니다. 쓸만한 것은 라이브러리로 올려 다음 강의에 재사용합니다. - 로고 같은 반복 수집 — 브라우저 조작이 되는 환경이라면 수집과 파일명 정리를 맡길 수 있습니다. 다만 이미지마다 사용 조건이 다르므로 출처와 라이선스는 사람이 확인해야 합니다.
- 사례·수치 — 웹에서 찾아 오게 하되 슬라이드에 출처를 함께 적게 합니다. '검증하지 않은 수치는 쓰지 않는다'를 절대 규칙에 넣어 두었습니다.
- 끝까지 사람 몫 — 무엇을 가르칠지(콘텐츠), 어느 쪽이 더 나은지(스타일 판단), 최종 검수. 이건 줄지 않았습니다.
따라 하기 전에 · 보안에서 지킬 네 가지
AI에 폴더를 연결한다는 것은 그 안을 다 보여준다는 뜻입니다. 시작 전에 네 가지만 정리하세요.
- 연결 범위를 폴더 하나로 좁힙니다. 홈 디렉터리나 클라우드 드라이브 전체를 연결하지 않습니다. 작업 폴더만 연결하면 사고가 나도 범위가 그 안에서 끝납니다.
- 고객사 자료는 그 폴더에 두지 않습니다. 계약서·단가표·수강생 명단·미공개 자료처럼 남의 정보가 든 파일은 애초에 들어가지 않게 합니다. 강의자료 제작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.
- 지우는 동작에는 확인 단계를 넣습니다. 위 명령어 사전처럼 '먼저 보고, 승인 후 이동' 순서를 규칙으로 박아 둡니다. 삭제보다 이동을 기본값으로 두는 편이 안전합니다.
- 나가는 자료는 사람이 마지막에 봅니다. AI가 가져온 수치의 출처, 이미지의 사용 조건, 그리고 사내 정보가 섞이지 않았는지 — 배포 전에 한 번은 사람 눈으로 확인합니다.
하루가 끝나고 남은 것
그날의 산출물은 강의자료 두 벌(특강 16장, 4시간 과정 70장)이었습니다. 같은 내용에서 홈페이지 커리큘럼 페이지와 이 칼럼의 기획안까지 나왔으니, 하나가 세 갈래로 갈라진 셈입니다.
그런데 가장 값나가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. 방침 파일과 삽화 라이브러리입니다. 강의자료는 그 강의에서 끝나지만 이 둘은 계속 씁니다. 도구는 바뀌어도 이 자산은 남습니다 — 투자할 곳은 도구가 아니라 자산이라는 게 이번에 얻은 결론입니다.
돌아보니 제가 B2A 교육과정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습니다. 사람에게는 매뉴얼, AI에게는 실행 규칙 — 같은 문서 하나. 지난 칼럼에서 "도구보다 문서가 먼저"라고 썼는데, 그 말을 제 일에 적용하니 이렇게 나왔습니다.
자주 묻는 질문
방침 파일이라는 게 정확히 뭔가요?
제 기준을 적어 둔 텍스트 문서 한 장입니다. 확장자는 .md를 쓰지만 메모장 파일이어도 됩니다. '새 자료는 이 양식을 복제해서 만든다', '표 안은 세로 중앙 정렬' 같은 규칙을 한 줄씩 적어 두고, AI가 일을 시작할 때 이 문서부터 읽게 하는 것입니다. 사람 신입에게 건네는 업무 매뉴얼과 다르지 않습니다. 다른 점이라면 AI는 매번 빠짐없이 읽는다는 것 정도입니다.
코딩을 알아야 할 수 있나요?
아니요. 이 과정에서 제가 한 일은 전부 문서를 쓰고 파일을 폴더에 넣는 일이었습니다. 규칙을 문장으로 적을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. 저는 개발자가 아닙니다.
PPT 말고 다른 업무에도 되나요?
됩니다. 원리는 '정해진 양식 + 반복되는 판단 기준'이 있는 일이면 같습니다. 제안서, 보고서, 견적서, 회의록처럼 형식이 정해진 문서 업무가 특히 잘 맞습니다. 양식 파일과 완성본 샘플이 이미 있다는 점에서 출발선이 같기 때문입니다.
오늘 한 가지만 해보시길 권합니다. 반복되는 업무 하나를 고르고, AI에게 시킬 때마다 나온 수정 지시를 문서 하나에 쌓아 보세요. 일주일이면 열 줄쯤 모입니다. 그 문서가 조직의 첫 방침 파일입니다. 새 도구를 알아보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빠릅니다.
이 시스템을 만드는 과정과 B2A 전환 전략은 B2A 교육과정(4시간)에서 실습으로 다룹니다. 사내 교육을 검토 중이시라면 문의 페이지로 편하게 연락 주세요.